영혼의 나병 - 자가 소외 중독 (루카17,11)
- 수영 유

- 2022년 10월 13일
- 2분 분량
“제 의도가 왜곡될 때, 그 속상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왜곡되고, 오해되었다는 이야기, 자신의 의도는 나쁜 뜻이 하나도 없었다, 맞다, 옳다,는 주장이기도 했고, 그래서 무시당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경우가 어떤 것인지, 의도가 정화되고 순수한 것인지 식별이 필요한 경우였습니다. 정화된 의도라면 그 열매도 합당하게 맺히며, 그렇지 못한 의도는 대부분 분열이 만들어집니다. 때로는 자기 기만을 하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에 이 형태는 자신도 깨우치지 못한 누군가를 소외시키기(미움의 마음이나, 복수심 또는 시기, 질투를 유발하기 위한 등) 위한 의도로 다른 삼자에게 친절을 행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한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나의 의도가 왜곡된 경우, 단순히 그것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속상함의 정도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 분노까지 동반한 경우였기 때문에, 정말 그 속상함은 분노로 표현되었고, 그 분노로 인해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마음을 먹게 되는, 그분의 오래된 하나의 패턴과 같은 모습이 보였던 경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관계를 끊어 버리는 마음, 그 패턴에 자가 소외 중독이라 이름 부칠 수 있습니다. 일명 소외감에 중독된 분들, 누군가를 내치지만 결국은 자기 스스로를 소외, 왕따 시키는 분들의 보편적인 상처는 어린시절 부모님에게 따듯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때로는 너무 엄격한 부모님, 신경을 쓰지 않은 상처들입니다.
남들이 따돌리기 전에 (내쳐지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자기를 소외시키는, 하나의 방어기제처럼 마음의 문을 닫고 벽을 세우는 스스로 고립되기를 선택하는, 피해의식에 뿌리를 둔 원초적 소외감(외로움)으로 인해 자신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기에 자기 소외이고, 이것에 중독이라 이름을 더하는 이유는, 마치 중독된 어떤 상태처럼도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들의 마음은 그러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의 외적 아픔은 알고 있습니다. 그 보다 더한 아픔은 마음의 고독감, 소외감이었습니다. 외적인 모습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그 상처는 영혼의 나병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의 나병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사람으로, 모든 것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게 되는, 영적인 자가 소외 중독 환자로 만들고, 영혼은 잠식되고 있었습니다.
생각에 중독되어 있는, 무엇에 잘못되어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는 분들은 도움이 필요하지만, 자신들이 맞다 생각하는 망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소외감으로 인한 비참함에 젖어 있기에 무기력, 절망에 빠지기 때문에 속상함에, 억울함에만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런 나병 환자들의 영혼의 나병까지 치유해 주십니다.
단순한 외적 치유 사화가 아니라, 이 영적 치유를 “구원”과 연결해서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난 일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라 전합니다.
복음에서 구원은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고 구속되어 있는, 구속시키는 많은 상처들이 지니고 있는 힘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권능의 힘입니다. 제2독서에서처럼, 현실에서는 “감옥의 고통을 겪지만 감옥에 갇혀 있지 않은” 자유로운, 구원된 이는 열 명중 한 명뿐이었습니다.
자가 소외 중독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자기를 기만하고 있는 내면의 아이와 만나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당연히 가지는 감정이고, 그 감정에 솔직하는 것입니다.
자신안의 비참함으로 끌려가지 않게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비를 입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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